'임용고시 교육학/교육학 용어 사전1 : 한국교육사'에 해당되는 글 96건

조선 시대 아동용 교재 여러가지가 있어 헷갈리다는 의견이 있으셔서요....

노래로 정리해 올려 봅니다.

흠~~~~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고 비디오라 먼저 비디오 부터 감상하시고 공부는 그 뒤에 (ㅋㅋㅋㅋㅋ 역시 흥미가 당겨야 교육은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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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민영

저는 이 블로그를 유아교육, 초등교육 그리고 중등교육 까지 우리나라의 교육에 관심있는 모든 부모님들과 예비교사 분들 그리고 현직교사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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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과 :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산술, 체조(사정에 따라 체조 대신 한국지리, 역사, 도화, 외국어 가운데 1~2과목 대체 가능)

고등과 : 수신, 독서, 작문, 습자, 본국지리, 본국역사, 외국지리, 외국역사, 이과, 도화, 체조 (사정에 따라 외국지리, 외국역사, 도화 중 1~2과목 빼고 외국어 추가 가능. 여학생에게 재봉과목 추가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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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문제에 많이 자주 출제되는 유형원 선생의 교육사상을 네가지로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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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을 경건하게 하여 이치를 구하는 것

2. 궁리(窮理)는 만물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을 뜻하고, 거경(居敬)은 궁리에 임할 때의 마음의 자세를 의미한다.

3. 이치를 궁구하는 데는 실마리가 많으므로 한 가지 방법만이 아니라 여러 길을 살펴보면서 마음이 밝아지고 의리와 실상이 점차로 눈앞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

4. 窮理와 居敬은 비록 머리와 꼬리의 관계에 있지만, 실은 각기 독립된 공부이고, 그러면서도 서로 병행되며,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 궁리는 만물의 이치를 일시에 깨닫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이치를 터득함으로써 마침내 본래의 원천적 이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거경은 성정을 통합하고 이기를 합일시키는 자리로서 아직 발하지 않은 상태를 암시하는 정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거경함으로써 움직임과 고요함을 서로 관통하고 또한 깨달은 바를 실천하는 데 기본 되는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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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

명(明)나라의 왕수인(王守仁)에 의하여 주창된 유학의 한 계통. 심학(心學) 또는 양지학(良知學)이라고도 한다.

2. 개요

(1) 심즉리(心卽理)와 지행합일론(知行合一論)
왕수인이 28세에 관리가 되고, 중앙정부의 부패와 맞서 싸우다가 귀양가는 등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깨친 것이 심즉리 사상이었다. 그러나 육구연(陸九淵)도 심즉리란 용어를 썼기 때문에 흔히 육왕심학(陸王心學)이라고도 하지만 그 내용은 같지 않다. 주희가 존재와 심성을 이원화한 데 반하여, 왕수인은 이(理)는 기의 조리(條理)요 이의 운용이라 하여 이즉기(理卽氣)로 일원화 한다. 이런 결과로 지식과 실천에 있어서도 그는 지행합일을 주장하였다.

(2) 치양지설(致良知說)

양지(良知)란 개념은 물론 ·맹자·의 양지양능(良知良能)에서 따왔는데, ·맹자·의 이것은 선천적으로 도덕적인 지각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며, 왕수인의 치양지설은 인간의 성품에는 천연의 양지가 있는데, 이를 온전하게 기르고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뒤 태주학파(泰州學派)인 이른바 양명좌파는 양지란 바로 눈앞에 드러나 있다는 양지현성설(良知現成說)로 발전시켰다.

3. 수용과정

(1) 동전연대(東傳年代)
우리나라에 왕수인의 ·전습록(傳習錄)·이 전해진 것은, 박상(朴祥)과 김세필(金世弼)에 의하여 ·전습록·이 변론된 바가 있어서 이미 왕수인 생전에 그의 학설이 수용되었다고 하겠다.

(2) 수용과정

이황(李滉)과 박세채(朴世采)와 한원진(韓元震) 등에게 계속 배척을 받았던 양명학은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 등에 의하여 수용되기 시작하였고, 허균(許筠)이수광(李·光) 등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허균은 양명학 특히 좌파인 이지(李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점이 많다. 그는 이지의 ·분서(焚書)·를 읽고 이지처럼 유교적인 예교주의(禮敎主義)를 반대하여, 이지의 〈동심설〉과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허균이 남녀의 정욕을 천성이라고 주장한 점이라든지, 민족적 영웅을 묘사한 ·홍길동전·은 주자적인 엄숙주의에 저항하여 그 허위성을 공격한 것으로서, 모두 이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수광 역시 양명학파의 사상을 넓게 인용하고 있음을 ·지봉집·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양명학을 수용한 것은 장유(張維)와 최명길(崔鳴吉)이다. 장유의 ·계곡만필(谿谷漫筆)·은 우리나라 양명학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자극하였다. 정제두(鄭齊斗)의 〈이목구비설〉이나, 최석정(崔錫鼎)이 ·전습록·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모두 ·계곡만필· 때문이다. 최명길은 장유와 사상과 행동을 같이 한 사람인데, 심양(瀋陽)으로 떠나는 길에서 아들 후량(後亮)에게 "학문함에 여러 소리 할 것 없이, 스스로의 마음 참된 것과 망령된 것을 제 스스로 알라."라고 한 것은 양지에 입각하여 노력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4. 학파형성

우리나라 양명학파가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은 정제두(鄭齊斗)에 의해서이다. 정제두는 ·존언(存言)·에서 당시 주자학자들의 학문이 개인의 영달과 공리로 흐르는 데 반성을 촉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희를 끼고 권위를 짓는 행위가 마치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하는 것처럼 남을 복종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는 현황을 반대하였다. 그것은 당시의 노론과 소론 등 파당싸움을 배격한 것이다.

(1) 일원론(一元論)의 관철

정제두의 학문은 주자학처럼 이원적인 상응논리에 의거하지 않고 상즉논리(相卽論理)에 근본하는 일원론이었다. 하늘과 사람은 심성에 의하여 일원화되었으므로 우주와 인생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일원론적 사고는 이기와 성정, 인심과 도심, 지와 행, 심과 이, 모두가 서로 상즉(相卽)하는 관계로 설명되며 그 모든 것은 심체(心體)의 작용이 아닌 것이 없다. 그에 있어서 이란 주희처럼 사물의 조리나 이치가 아니라, 내 마음의 양지라는 것이다. 사물의 이가 그에게는 생명적이며 주체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란 마음의 신묘(神妙)하고 밝은 작용이지 죽은 사물이 아니며, 사물의 까닭으로서의 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2) 양지론(良知論)

정제두는 심즉리에 바탕하여 양지는 천리요, 천리는 양지라 하는 양지론을 전개한다. 그는 자기의 이가 주희의 이처럼 소·말·닭·개와 같은 동물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한마음에서 찾자는 것이라 하고, 주희처럼 객관적인 사물에서 이치를 찾는 이른바 즉물궁리(卽物窮理)가 아니라, 내 한마음을 사물에서 발휘해 나아가는 것이므로 동물의 이치처럼 도식화할 수 없는 나의 주체적인 양지를 객관적인 사물에서 실현한다고 하였다. 외향과 내향의 갈림길이 여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우주는 모두가 양지가 현실화된 것이라 보고 그 본래성이 곧 양지라고 하였다.

(3) 하곡학(霞谷學)의 우경화(右傾化)

왕수인이 죽고 난 뒤에 우파와 좌파 혹은 정통파로 분파되었는데, 특히 좌경화한 태주파에서 이지 등의 극좌파가 발생하였다. 정제두는 죽기 5년전에 ·양명집(陽明集)·을 보고 이지 등의 극좌파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이미 양명학 속에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중국의 양명학파가 신분주의를 타파하고 일반 서민대중에 파급된 것과는 달리 정제두에게서는 그러한 혁명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가 없다. 이 점은 그가 만든 가법(家法)의 몇 조(條)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서얼(庶孼)을 눌러 사당에 들어가 적자손(適子孫)과 같이 하게 하지 말 것, 둘째 비첩(婢妾)의 무리는 천대하고 첩의 예로 대하지 말 것, 셋째 양반 친척은 한 당이 되고 아랫것들이나 잡된 무리가 이간시키지 못하도록 할 것, 넷째 주인을 높이고 노비를 억압할 것, 다섯째 노비가 어른을 믿고 아이들과 부녀들을 만만히 여기게 되면 뒷날에 노비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니, 양반은 어른이나 젊은이나 모두 한몸이 되어 처음부터 주권을 행사할 것 등이다. 이와 같은 그의 가법은 왕수인이 내세운 인간의 평등과 존엄사상이 부인되고 오히려 봉건적 신분주의를 옹호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당시의 정주학적인 허위는 미워하였으나 사상적인 혁명성은 없었다고 하겠다.

(4) 강화학파의 학문경향

정제두가 강화도에서 학문을 하며 양명학을 천명할 때 그의 자손과 이광사(李匡師)·이광려(李匡呂), 손서인 이광명(李匡明), 다른 손서 신대우(申大羽) 등의 종형제와 심육(沈·)·윤순(尹淳)·이진병(李震炳) 등이 모여들어 하나의 학파가 형성되었고 200여 년간 계속되었다. 역사학에 있어서는 이종휘(李鍾徽)가 양지사관(良知史觀)에 입각하여 역사를 파악하였다. 그들은 왕수인의 양지학·심학을 기초로 하여 사학(史學)과 정음(正音)·서예(書藝)·시문(詩文)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양지·정서·의지를 함께 통일한 것이었고, 참된 것을 구하고 헛된 것을 버리는 양지학이지만 정치관으로 나타날 때에는 진(眞)과 가(假)라는 논리에 의거하여 노당(老黨)의 가대의(假大義) 배격을 특색으로 하였다. 그들은 모든 학문에서 양지를 심볼화하고 이미 비인간화한 사회에 도전하면서 실학파와 제휴하였는데, 특히 실학파 중에서 북학파는 양명학을 받아들인 자취가 뚜렷하다. 그들의 학문경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주체적인 양지사관은 이종휘로부터 이광사의 큰아들인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과 이광명의 아들 이충익(李忠翊)의 ·군자지과(君子之過)·와 이면백(李勉伯)의 ·감서(·書)···해동돈사(海東惇史)·, 그의 아들 이시원(李是遠)의 ·국조문헌(國朝文獻)·과 그것을 토대로 한 이건창(李建昌)의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의 업적이 빛나고 있다. ② 우리나라의 언어인 정음(正音)의 연구 또한 주체성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는데, 이광사의 정음연구를 이영익(李令翊)과 이충익이 계승하고 정동유(鄭東愈)와 유희(柳僖)가 더욱 발전시켰다. ③ 윤순의 서예는 이광사에 이르러 원교체(圓嶠體)로 창조되고, 이긍익·이충익과 특히 정문승(鄭文升)의 서화는 산수화에 뛰어나 ·근역서화징(槿域書·徵)·에 소개되어 있다. ④ 이광려·이충익·이건창은 모두 이지의 영향을 받은 공안파(公安派)의 성령문학(性靈文學)에 기본을 두고 있다. 신대우의 〈이참봉문집서〉에 의하면 이광려의 글은 성령을 발휘하였다고 하였으며, 이충익의 〈이참봉집서〉에 의하면 문장됨이 선배의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시세(時勢)에 구애되지 아니하였다고 한 것도 바로 공안파의 문장론의 기본이었다. ⑤ 강화의 양명학은 실학과 제휴하였다. 이상학(李象學)은 정약용(丁若鏞)을 연구하였고 신작(申綽)은 정약용과 교우하였으며, 정문승은 농서(農書)에, 정후일(鄭厚一)은 수학연구에 조예가 깊었다. 이들은 양지를 심볼화하여 문학·언어연구·서예·시화에서 혹은 실학에서 그것을 구체화하였다.

(5) 양명학과 실학파

실학파 가운데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 이른바 북학파 혹은 이용후생파의 중심인물들은 양명학에 의하여 사상적으로 무장한 것이라 간주된다. 홍대용이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 허(虛)와 실(實)의 대결에 관하여 말한 것이나, 그의 사상 중 대동사상과 교육이론은 양명학과 접근되고 있다. 그가 "천지는 하나의 큰 부모와 동포가 되니, 어찌 화(華)·이(夷)의 틈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왕수인이 "천지만물은 한몸이다."라고 한 것과 유사하고, 사민평등관(四民平等觀)에 근거한 교육제도의 주장도 왕수인의 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다. 박지원의 한문소설에 일관된 것은 이지와 공안파의 문학이론이며, 일상용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문장법도 이지가 이미 〈동심설〉에서 주장한 것이다. 〈양반전〉 혹은 〈허생전〉에서 허위가 탈을 벗기고 지도자들의 가심(假心)을 폭로하고, 신분주의를 배격한 것은 모두가 〈동심설〉과 맥락을 같이한 것이다. 그가 글짓는 것에 대하여 ·열하일기·에서 "사실대로 짓는 곳에 글의 참맛이 있는 것이니 하필이면 먼 옛날을 끌어올 게 무엇인가. 한당(漢唐)은 지금이 아니요, 풍요(風謠) 또한 중국과 다르다. 반고(班固)나 사마천(司馬遷)이 만약에 다시 살아 나온다 하더라도 결코 반고나 사마천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글을 만들어내기란 비록 어렵다 하더라도 자기의 생각대로 그려내면 그만이지 구태여 옛 법에 얽매일 것이 무엇이냐."라고 한 것도 바로 공안파의 주장이며 이지의 〈동심설〉이다. 이를 곧 개성적인 성령문학이라 한 것이다. 그는 공안파의 중심인물인 원중랑(袁中郞)의 문집을 읽고 있었으며, 이지의 ·분서···장서(藏書)···속장서(續藏書)·등도 독파하고 있음을 그의 〈도강록(渡江錄)〉 또는 〈관내정사(關內程史)〉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박제가가 그의 〈북학변(北學辨)〉에서 이학(理學)보다는 성의(誠意)가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명나라 말 유종주(柳宗周)의 신독(愼獨)·성종심학(性宗心學)과 연결되고 있다.

(6) 양명학과 광복운동
양명학과 관련된 독립운동가는 김택영(金澤榮)·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송진우(宋鎭禹) 등이다. 김택영은 양명학자 이건창을 만나 사귀면서 주희의 주지주의를 반대하며 양명설에 동조하였다. 박은식은 ·왕양명선생실기·와 ·유교구신론· 등을 지어 양명학을 천명하였다. ·유교구신론·에 의하면, 첫째 유교가 종래 민중사회에 보급하는 정신이 부족하였고, 둘째 유교는 교화에 소극적이며, 셋째 주자학은 너무 번거로워 이해하기가 어려우므로 간단절요한 양명학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그는 과감한 실천을 더욱 강조하여 한국적 양명학을 창도하였다. 그의 ·왕양명선생실기·는 양지설과 사상마련·발본색원론·교육론 등의 이론적인 개설이 아니라 실천을 통하여 체험한 것을 함께 서술하고 소개한 우리나라 초유의 양명학 연구서이다. 그는 양명학적 처지에서 과학의 비도덕화에 의한 근대과학의 병폐를 지적하였다. 정인보의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은 우리나라 양명학연구에 있어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저술이다. 이 책의 근본내용은 조선혼의 환기에 있었다. 한갓 양명학 연구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조선혼인 '우리의 얼'을 고취하여 광복을 꾀하자는 것이다. 그는 과거 수백 년간 조선의 역사는 허(虛)와 가(假)가 연출한 자취라고 비난하고, 조선 수백 년간의 학문은 오직 유학이었고 또 정주(程朱)만을 신봉한 결과, 그 학설을 받아 자기의 편의를 꾀하려는 사영파(私營派)와, 그 학설을 배워 중화적전(中華嫡傳)을 이 땅에 드리우고자 하는 존화파(存華派)가 생겨나는 폐단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정인보에게서는 강화학파를 계승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의 공적은 처음으로 한국의 양명학사를 밝혀놓았다는 데 있다.

출처

한국사기초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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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의 설총(薛聰)이 신문왕(神文王)을 상대로 군왕(君王)의 유의할 점을 깨우쳐 준 일종의 교훈.

2. 군왕을 화왕(花王 ; 모란)에, 간신을 장미에, 그리고 바른 신하를 백두옹(白頭翁 ; 할미꽃)에 비유하여 군왕은 간신을 멀리하고 정직한 신하를 가까이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3. 이 내용은 삼국사기(三國史記) 46권의 설총전(薛聰傳)과 동문선(東文選) 52권에 나오는데, 일반적으로는 「화왕계」라 부르고 있으나 위의 동문선에는 「풍왕서」(諷王書)로 명명(命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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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조 중종 14(1519)년에 조광조 등 기묘사림의 건의에 따라 주로 조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게 하여 대책(對策)만으로 뽑은 과거의 일종.

2. 단 1회만 실시되었다.

3. 명칭은 한 대 찰거제(察擧制)의 일종인 현량방정과에서 취했다.

4. 추천방식은 서울의 경우 사관(四館)․중추부(中樞府)․육조(六曹)․한성부(漢城府)․삼사(三司) 등이, 지방의 경우 관찰자가 유향소와 수령을 경유한 자를 천거하였다.

5. 이렇게 천거된 120명의 성명․나이․자․천거사항 등을 예조가 종합하여 의정부에 보고하고, 이들을 근정전에 모아 왕의 친림 하에 대책으로 시험한 결과 김식(金湜) 등 28인이 선발되었다.

6. 그러나 기묘사화에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급제자들도 감금되었다. 그 뒤 인종 말년에 급제자의 자격은 잠시 복구되었으나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박탈되었다가, 선조 조에 사림정권이 실현됨으로써 완전히 회복되었다.

7. 교육사적으로 보았을 때, 현량과의 실시는 성종후반부터 대두하는 도학적(道學的)관심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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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당(書堂)의 스승

2. 학식의 표준은 일정하지 않아 강독(講讀)으로는 경사(經史)․백가(百家)를 통하는 실력 있는 훈장은 드물었고, 주석(註釋)과 언해(諺解)를 참고하여 가며 겨우 경서의 문장 뜻이나 해득할 정도가 많았다.

3. 벽촌의 훈장은 한문자의 활용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저열한 훈장도 많았으며, 제술(製述)로는 표(表)․책(策)․기(記)․명(銘)의 글을 짓고, 시(詩)․율(律)의 골수를 아는 이가 드물었다.

4. 사율(四律)이나 짓고 십팔구시(十八句詩)나 읊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궁한 고을의 훈장은 제술을 모르는 자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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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어(古語)의 해석을 다루는 고전문헌학

2. 훈고(訓詁)․고훈(詁訓)이라고도 한다.

3. 고전 해석상 기본적인 방법으로서, 학문적으로 정착된 것은 중국의 한(漢)나라 때부터이다. 후한(後漢) 때, 정 현(鄭玄)에 의하여 대부분의 경서(經書)에 대한 훈고가 집성되었는데 당(唐)나라의 오경정의(五經正義)가 성립될 때까지 훈고학의 학풍은 계속되었다. 청(淸) 나라 때에 이르러 학풍이 일신되어 종래의 고어에 대한 자구(字句) 해석에만 만족하지 않고 고대언어 연구의 비판적인 새로운 방법론을 전개시켰다. 이리하여 청대(淸代)의 학문을 고증학(考證學)이라고 부르는 데 대하여 한(漢)․당(唐)의 그것을 훈고학이라고 구별하여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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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고시대 삼한에 공존했던 민간주도의 촌락공동체적 청년조직을 신라 진흥왕이 율령관인(律令官人)과 무관의 수요를 충당키 위해 교육체제로 제도화한 관 주도의 청소년 수련단체. 일명 국선도, 풍월도, 원화도, 풍류도라고도 한다.

2. 원래 솟대제단의 수호자들이던 화랑도는 사회생활의 규범과 전투원으로서의 실력을 갖추기 위해 교양을 쌓고 심신을 단련했다.

3. 그들은 사회중심 인물로서 전통을 존중하고 협동정신과 신의(信義), 용감성을 배양하는 데에 수련의 목적을 두었다.

4. 이러한 기풍은 고구려와 백제에도 있었으나 신라에서 가장 왕성했다.

5. 신라가 화랑도를 체계화한 것은 기록상 진흥왕 37(576)년으로 되어 있으나, 원화인 두 여인 남모와 준정의 사건 이후 귀족출신의 자제 중 품행이 곧고 얼굴이 아름다운 남자를 국선으로 뽑았고, 진흥왕23(562)년에는 화랑 사다함이 대야성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운 기록이 있음을 보아, 화랑도는 이미 진흥왕 초에 체계화된 것으로 보인다.

6. 초기의 화랑도는 화랑과 낭도로 조직되어 있었으나, 관주도하에 편입된 후에는 총지휘자에 국선을 두고 화랑과 낭도를 소속시키는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7. 화랑도의 가장 중요한 수양방식은 서로 도의(道義)를 닦는 것, 시와 음악을 즐기는 것, 명산과 대천(大川)을 두루 찾아 다니며 즐기는 것 등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의 양성과 상무(尙武)의 정신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8. 이러한 조직과 수양을 통하여 화랑도는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벗을 위하여 죽으며, 대의(大義)를 존중하여 의에 어긋나는 일은 죽음으로써 항거하고, 병석에서 죽는 것을 꺼리고 국가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함을 찬양하며, 오직 앞으로 나갈 뿐 뒤로 물러섬을 부끄럽게 여겨 적에 패하면 자결할망정 포로됨을 수치로 아는 등 장렬한 기백과 씩씩한 기상을 함양하였다.

9. 이러한 기품은 유․불․선 정신과 결합되어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와 삼덕(三德)으로 신조화되었다.

10. 세속오계

⑴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라

⑵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라

⑶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라

⑷ 싸움에 물러나지 말라

⑸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내용이며 삼덕은 겸허, 검소, 순후(淳厚)이다.

11. 이러한 정신은 삼국통일의 용감한 투사를 양성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김유신, 김흠춘, 죽지, 사다함, 관창, 원술, 비령자 등이다.

12. 성덕왕때 김대문은 《화랑세기》(花郞世記)에 200명의 화랑을 추려 싣고 그 훌륭한 업적을 기술하고 있다.

13. 화랑도는 진흥왕 이후 문무왕에 이르는 동안 가장 융성하였으나, 통일 후에는 정신적인 해이와 안일, 퇴폐사상의 만연으로 화랑정신이 약화되었다.

14. 그러나 그 정신은 고려조와 조선조에 면면히 이어져서 국가 유사시에는 호국, 애국, 독립, 구국정신으로 민족의 피 속에 존속되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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